님의 이름은 국형(國衡)이요 자(字)는 여집(汝執)이시니 본관은 교동이다。춘추(春秋) 때에 정목공(鄭穆公)의 증손 단(段)이 조부의 이름자로 성씨를 삼으니 이 분이 득성시조(得姓始祖)요 신라 유례왕 때에 휘 서(瑞)에서 중국의 풍익(馮翊)으로부터 우리나라로 나오셔서 태상박사(太常博士)가 되었고 벼슬이 아찬(阿湌)에 이르시니 이 분이 동래시조(東萊始祖)가 되시며 고려 인종 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교수부원군(喬樹(즉 교통)府院君)에 봉하신 휘 빈(邠‥호는 초당 시호는 文貞)께서 득관(得貫)하신 중시조(中始祖)가 되신다。 석성부원군 첨의평리사 휘 당(璫)은 十六世祖요、이부시랑 병부상서이신 휘 해(海)는 十五世祖요、판밀직사 사함산군이신 휘 원보(元寶)는 十四世祖요、삭주부사(朔州府使)이신 휘 인경(仁敬‥호는 雅川)께서는 十三世祖요、통훈대부 강서현령이신 휘 근(瑾)께서는 十二世祖요、절충장군 부호군이신 휘 철관(鐵寬‥호는 望溪)께서는 十二世祖요、통훈대부 사헌부 장령이신 휘 삼권(三權‥호는 毅齋)께서는 十世祖요 숭사랑(承仕郞)이신 휘 희윤(希尹)께서는 九世祖이시다。 숭사랑공 휘 희윤(希尹)께서 비로소 당진군 면천면 죽동리(옛 竹洞)에서 사셨는데 三대를 내려와 통정공(通政公)이신 휘 홍헌(弘憲)에 이르러 비로소 당진으로 들어와 옮겨서 사셨으니 이 분께서 님(府君)의 五世祖이시다。고조의 이름은 취규(取珪)요 증조의 이름은 세중(世重)이요 조부의 이름은 정연(廷璉)이요、아버지는 이름이 이수(以秀)이시니 독실히 배우고 부지런 하여 실천함이 많으셨고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광열(光悅)의 따님이시니 二남을 낳으시매 큰아들은 국주(國周)요、작은 아들은 즉 공(公)이시니 정조 임인 十二월 十四일에 출생하시었다。후취 어머니(繼妣)는 한양조씨로 도행(道行)의 따님이시니 一남 국언(國彦)을 낳았다。 님께서는 어려서부터 효도하고 공손하였으며 겸손한 덕이 있었는데 장성함에 이르러 장차 분가(分家)께 되었는데 백씨(伯氏)가 전해오던 가재(家財)를 모두 털어서 내놓으시매 중형과 계씨(季氏)에게 주고 님께서는 사양하며 받지 않고 다만 치(箕)와 절구 및 쌀 三되만 가지고 나와서 조그만 초가(斗屋)를 마련하여 사셨고 계모에게 효성을 다하여 환심을 사시어 온 집안이 화기(和氣)에 넘치니 사람들이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가풍이라 칭송하였다。 부지런히 심고 거두기를 주야로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검소한 의복과 음식으로 사셨어도 스스로 즐거워 하였다。 혹 입에 맞고 몸에 맞는 것이 있으면 비록 적은 것이라도 반드시 계모에게 드리니 이웃과 온 마을이 민자건의 효도라고 일렀다。 전후의 상중(喪中)에는 조석으로 묘소에서 곡하였고 三년상을 모시매 한결같이 첫날과 같이 하였다。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림을 꾸리매 조그만 시간도 헛되어 보내지 않고 하나의 물건이라도 망녕되어 허비치 않았다。 조그만 것이 쌓여서 백천(百千)이 되매 언제나 전답을 사들였으나 파는 쪽에 만약 어버이가 늙고 심히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제값 외에 돈을 더 주어서 노인을 봉양케 하였으며 꿔준 것을 받거나 이자를 취하매 항상 후하게 가고 적게 오게 하였고 소작인(小作人)에 이르러서도 한 번 맡기면 변동치 않아서 그 사람이 죽으면 그 아들과 그 손자들이 예전대로 경작케 하니 모두가 기쁘게 따랐다。물건을 팔고져 하는 사람은 모두가 사 주기를 원케 되매 이러므로 두 부근의 전답이 대략 남의 소유가 없게끔 되었다。 만년(晩年)에 이르러 새 집을 옛 초가 옆에 지었으나 옛 초가는 그대로 두어서 헐지 못하게 훈계를 내렸으니 이것은 가난을 잊지 않음이요、겸손은 오히려 이익을 받음이라 칭송이 자자하였다。살던 마을 이름이 본래는 잠골(潛谷)이었는데 지금은 찬동(讚洞)이라 하니 찬동의 훌륭한 명칭은 님으로 해서 생겨난 것이다。님께서는 현종 갑진 九월 二十七일에 돌아가시었다。배위는 공주이씨로 환(煥)의 따님이시니 숙덕(淑德)이 있었고 철종 을묘 十二월 二十三일에 돌아가시매 당진군 석문면 장고항리 찬샘골의 둥근봉 아래 갑좌에 쌍분 이시다。 三남三녀를 두시매 큰아들 재종(載宗)은 효성이 타고났고 문학이 훌륭하여 관에서 표창이 있었고、작은 아들 재신(載信)은 재당숙에게 양자 갔으며、셋째 아들 재황(載鐄)은 또한 효행과 문학으로 이름이 있었다。딸은 서녕 류동양(柳東陽)、부안 김치홍(金致弘)、부안 김이철(金履哲)에게 시집갔다。손자는 홍석(洪錫)이요、셋째 집 손자는 희석(禧錫)이요、증손은 학수(鶴洙)니 주사(主事)요、용수(龍洙) 노수(魯洙)는 위원이요、태수(台洙)는 주사(主事)요 탁수(鐸洙)이다。그리고 셋째 집 증손은 형수(瀅洙)이다。 슬프다! 오늘날 우리 수십 집안의 수백 식구가 능히 의식이 족하여 주리고 추운 것을 알지 못하고 글자를 아는 것이 모두 님께서 주신 것이로다。님의 평소에 행하신 아름다운 행적이 마땅히 이에서 그치지 않으나 견문이 미치지 못하고 다만 옛 초가가 지금도 장조카 장환(章煥)의 집 우측에 있어서 조석으로 보게 되매 완연히 높으신 영혼이 여기에 내려와 계신 것 같고 일깨워 주시는 기침 소리가 들리는 듯하매 추모의 정이 미칠 수 없어 공경히 눈물 흘릴 따름이다。 서기一九三六年 丙子 四月 二十七日 玄孫 前行監理署主事 文植 泣血謹書